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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소식] 진례면 마을별 지명 유래^^

작성일
2013-07-23 11:12:53
담당자 :
진례면 곽은정
조회수 :
3655
전화번호 :
055-330-8654
관곡(冠谷)
옛날 진례 동쪽을 율리면 서쪽을 청내면이라 불렸는데 지금의 진례면 청천리라는 말로 일정 때 바뀌었고, 오늘날 청천리 안에 관곡 다곡 곤법이 있다. 청천(晴川)은 맑은 내를 말한다. 관곡은 오래전부터 다곡에 속해 있다가 1982년 남해고속도로가 동네를 갈라놓아 다곡에서 관곡으로 법정동으로 분동되었고 조그만 시내를 사이에 두고 진영읍 의전리와 접경하고 있다.  

다곡(茶谷)
옛날 가락국 때 텃골에 태씨가 터를 잡아 살다가 큰불로 동리가 불에 타서 태씨(太氏)는 텃골을 떠나고 임진왜란 때 김해 사충신의 한 분인 류식공의 아드님인 수홍공이 대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고부터 다곡은 류씨의 집성촌으로 사백여 년을 이어온다.  

상곤법(上昆法) 
곤법이라는 마을 이름 전에 화법(花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마을의 형상이 마치 꽃봉오리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곤법의 명칭은 인륜과 예의 법도를 으뜸으로 숭상한다 하여 곤법이라고 부서 고법야촌(경상도지리지에서 나옴)에서 개칭된 것 같다. 지형상 윗마을을 상곤법이라 한다. 1951년 상 하곤법으로 나누어졌다.  

하곤법(下昆法) 
마을 명칭을 화법이라 한 것은 산등성이가 꽃의 형상과 같다고 화법이라 명칭 한 것 같으며, 먼저 입촌한 성씨는 파평윤씨, 능성구씨, 경주최씨가 살았다고 전하나 지금은 살고 있지 않으며 광주안씨, 청도김씨, 창녕성씨 순으로 여러 성씨가 있다.
새터의 광주안씨 족보에 1592년(임진왜란 때)에 선조가 거주한 것으로 보아 400여 년이나 된다.  

상촌(上村)
마을뒤 주봉인 시루봉 때문에 시루골이 되고 시례골로 바뀐 듯 하다. 목면봉의 내맥이 주용으로 비파등 정자등이 청용등이 되고 등대와 원등이 내외 백호등으로 마을을 좌우로 감싸 유수한적하고 물은 맑고 당은 비옥한 마을이다.
마을이 이룩되기는 조선인조때 근제처사 안경지가 이곳에 처음 자리 잡은 지 사백여 년 광주안씨의 집성촌으로 그간 유행(儒行)과 문한(文翰)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도문화재 염수당과 고문서가 동네 한 가운데 있다.  

하촌(下村) 
임진왜란 전에 광산 김씨가 살았다고 전해오며 시례리의 마을 이름은 논어의 홍어시입어예에서 나온 동명이라고도 하고 마을 뒤 주봉인 시루봉 때문에 시루골이 되고 시례골로 바뀐 듯하다.   

신기(新基)
노현에서 뻗어 내린 내맥이 마을의 주용으로 마을위에서 좌우로 갈라져 청용등과 백호등이 되어 좌우에서 마을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고 300여년 전에 입향조(入鄕祖)인 노강 박뢰의 조고인 지산 박령의 후손인 밀양 박씨의 집성촌이다.  

송정(松亭)
임진왜란전에 한골에 곽씨가 마을을 이루어 살았는데 꽤많이 살았고 행세도 한 것으로 마을 이름이 대동마을이었고 뒷산도 대동산으로 불렀으나 모두 떠나고 벽송정이라 불리어 오다 송정으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 한다. 소나무가 많다는 뜻으로 송정이라고 한다함(전해들은 내용 추가)
가야시대의 유물과 고분군이 있었으나 도굴되고 그 흔적과 우물들의 파편만 널려 있다.
김해 임란 충신의 한분인 송빈(宋賓) 공의 차자인 사천공이 처음으로 송정에 터를 잡아온지 어언400여년, 지금은 청주송씨의 집성촌이다. 송씨가 득세할 때는 망골과 한골은 송씨의 노배들이 살던 마을로 100여세대가 되었으나 송정이 쇠하기 시작하자 노비촌이 망하기 시작한 곳이 망골, 노비촌의 한가운데 마을이라고 한골이라 불렀는데 지금 대원사가 있는 일대의 골이다.  

청곡(淸谷)
청곡에는 조선 중엽부터 옹기굴이 생기면서 점차 번성하여 경남에서는 알아주는 옹기점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전부터 마을이 이룩돼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 초에 면사무소가 초전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오면서 파출소도 함께 옮겨 오고 해방 후에 5일장, 우체국, 농협, 보건지소, 소방파출소 등이 생기면서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아파트도 생기고 하여 1996년 1구와 2구로 법정 분동되었다. ‘점에’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옹기를 셀 때 한점두점에서 나왔다고 한다.
점터(옹기를 굽는 가마가 있던 곳)가 위치한 뒷산은 분청도예촌이 조성 중이며 2003년 가을에는 청곡 일원에서 제8회 김해도자기 축제가 개최되어 30여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등 성대히 거행되었다.  

상둔덕(上屯德)
시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약 300여 년 전 경북 달성군 논공면에서 김해김씨 김창택의 3형제분이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고 그 후로 다른 성씨들이 이주해 와 살고부터 마을이 이룩되었다고 전해온다. 

하둔덕(下屯德) 
지금부터 약 300여 년 전에 청주송씨, 김해김씨, 남양흥씨, 전주이씨 등의 성씨들이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1948년 둔덕마을이 상둔덕과 하둔덕으로 법정 분동되었고 마을 앞에 마을을 상징하는 희양나무가 3그루 있었는데 수령은 약 200여 년으로 명절에는 동민들이 그네를 뛰는 등 민속놀이를 즐기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2그루만 남아있다.   

산월(山越)
옛 문헌에 충훈리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이룩되기는 오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마을 앞 충훈천변의 충훈사지는 고려시대의 사찰로 부지가 수천 평으로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발굴조사단이 내려와 금동불상 1좌와 기타 많은 유물을 발굴한 것으로 전해 온다.
우리나가 일본에 강점된 후 일본인들이 송정리 716번지 일대를 중심으로 많은 뽕나무를 심어 집단거주하면서 농막, 산넘어(山越) 춘비골 등으로 불리어 경남도에서도 양잠으로 알려진 마을이 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산월부락으로 불리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초전(棗田)
초전이란 이름은 옛날 대추나무(棗:대추나무 조)가 많은 곳에 임 김 박 최 송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전해 오며, 조선조 때는 자여도의 역으로 초전리 750번지 일대 아름드리 숲들은 역마를 매던 곳이라 한다. 일제 초에는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초전리 830번지(지금의 초전마을 회관)에 있다가 1920년경 송정리로 이전되었다. 1954년에 마을이 현등, 본부락, 월촌으로 분동되었다가 1955년에 다시 초전을 합동되었다.  

돈담(敦談)
돈담부락은 진례면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마을의 지대가 조금 높아서 돋은 마을(돈담)이라고 불렸다고 전해온다. 돈담과 진례등 2개 마을로 구성되고 진례각단은 진례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6.25사변 때는 진례초등학교와 근처의 유휴지가 함안등지에서 피난 나온 피난민의 집단 수용처가 되었고 인구의 증가와 경제발전 등의 여파로 지금은 백조, 동원, 송정아파트와 현오빌라등과 상가 학원 등이 입주하면서 진례면 내에서는 제일 큰 마을이다.  

신안(新安) 
신안마을은 가락국의 수로왕이 왕자 한사람을 진례군(君)으로 봉하고 평지와 창원 사파정사이의 비음령에 진례성을 쌓고 토성에 태자궁을 짓고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갑오경장 후에 초전리에서 분동되고 마을은 해주 오씨와 남양 홍씨가 먼저 입촌하였으나 모두 떠나고 김해김씨, 밀양박씨, 경주최씨, 청송심씨가 입촌하여 여러 성씨가 집단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평지(坪地)
비음산 정상에는 가락국 때 조성된 진례산성이 있으며, 옛날에는 동래에서 마산, 진주로 통하는 길목으로 마을 입구에 주막집이 있었고, 남산재 5부능선에는 산막이라는 주막집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마을의 성촌은 최씨, 서씨에 이어 함안조씨가 약 300년 전부터 마을을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월(新月)
관모산 진등의 서쪽 산기슭에 마을을 이루고 살다 지금의 신월마을로 옮겨 살았는데 어느 시대인지 전해지는 기록이 없다. 마을앞의 얕으막한 언덕바지가 초생달처럼 생겼다고 新月(새달)이라 불렀고, 마을이 배설 또는 행주형이라 전해온다.   

중리(中里)
1850년경 점터마을(초전리 1,100번지 주변)에는 송씨, 박씨, 김씨, 양씨, 편씨, 주씨 등이 살다가 대홍수로 마을이 유실되자 송씨는 담안으로, 양씨 주씨 편씨는 새동편(학성)으로 옮겨가고, 박씨 김씨는 신월리 170~200번지 일대의 지금 중리에 옮겨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온다. 신당(신월)과 점터마을의 중간지점이라고 중리로 불리었다고 하며 그동안 신월부락에 속해 있다가 1979년 신월에서 중리마을로 법정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전(花田)
이조 초에 관에서 모래동 일대에 장(場:시장)을 세울 때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월에 속해있다가 1974년 지방도를 경계로 도로 위 마을은 화전으로 법정이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산본(山本)
김해의 진산인 용제봉이 배경으로 산아래 이룩된 마을로 ‘용제봉이 산의 근본이다.’ 하여 산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마을이 이룩된 시기는 전해오는 기록이 없다.  

용전(龍田) 
마을의 옛 이름은 생법으로 자여도에 속한 역으로 자여도는 고려 때부터 있었으니 마을은 역의 설치와 함께 이룩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에 입촌한 성씨는 남원양씨, 나주임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등이다. 

관동(官洞)
관에서 마을 아래쪽에 장(場:시장)을 세운 뒤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니 이씨조선 중엽 이후에 생긴 마을이다.  

강변(江邊)
약 100여 년 전에 청주송씨 김해김씨 분성배씨 3성이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아랫오룡이라 불렀다가 1920년경부터 강변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때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하천부지를 이용하여 묘목장으로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1970년 중반에 농경지가 정리되어 논농사 짓는데 적합한 농지를 변하고, 1980년부터 산업화의 물결 속에 크고 작은 공장이 40여 개나 부락 내에 설립되고 거주민도 130여 세대에 이른다.  

학성(鶴城)
학성마을은 면 소재지에서 동으로 2킬로미터 지점에 있으며, 동편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새동편이라 부르기도 하다가 냉정고개 당산나무에서 진등산의 끝자락까지 마치 학처럼 생겼다고 학성이라 불렀다. 솥골은 예전에 솥을 만들었으므로 솥골이라 부른다. 300여 년 전에 김녕김씨와 신안주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이룬 뒤로 여러 성씨가 옮겨와 마을이 이룩된 것으로 전해온다.  

당리(塘里)
약 400여 년 전에 청주송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이룬 뒤 여러 성씨가 옮겨와 마을이 이룩되었다. 마을 앞에 못이 있어 당지(塘池)라 하였다가 갑오경장 후에 당리마을로 개명하였다.  

오룡(五龍)
마을은 약 400여 년 전 청주송씨가 이주해 살면서부터 마을이 이룩되었으며 마을 이름은 안산이 용의 몸체처럼 길게 뻗었고 송씨의 아들 오형제가 훌륭하게 성장하여 잘 자랐으므로 아들 다섯과 앞산의 용을 따서 오룡이라 불렀다고 전해온다.
그 후로 동래정씨 형제가 이주해 왔고. 김해김씨등 여러 성씨가 옮겨와 마을이 이룩되었다고 한다.  

담안(淡安)
담안마을은 약 600여 년 전에 마을이 형성되어 초기에는 김녕김씨가 백사등 아래 뱀산을 중심으로 100여 년간 마을을 이루어 살았으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가고, 약 400여 년 전에 청주송씨가 옮겨와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한때는 송씨가 100여 호 살았으나 지금은 50여 호이고 타성도 20여 호나 되고 구씨 등의 집성촌인 서재곡은 1992년 법정 분동 되었다.
10여 년 전부터 많은 공장이 입주하면서 환경도 심하게 오염되고 순박하던 인심도 각박해지고 있다.  

서재곡(書齎谷) 
옛날 글을 가르치던 서당이 있어 마을 이름이 서재곡으로 그때부터 마을이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되나 전해오는 기록이 없고, 창원구씨가 입촌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는데 근 300여 년이 된다. 담안마을에 속해 있다가 1992년 법정분동 되었다.  

상평(上坪)
마을에 고인돌이 2기 있는 것으로 보아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나 전하는 기록이 없고, 선조 40년 정미년(1607년)에 김해부사로 부임하여 무신한 이경호의 후손이 경북 영천에서 상평으로 이주하여 평리(坪里)라 불렀으니 지금부터 약 400여 년 전으로 추축된다. 처음에는 평리, 들말(들 가운데 생긴 마을, 지금의 상하평 옛 이름) 등으로 불리다 근자에 와서 상평으로 부르게 되었다.  

하평(下坪)
약 300여년전 현풍곽씨 진양강씨 순흥안씨가 입주하여 살고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1956년 마을에 대진국민학교가 개교되어 47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곽주동 효자의 뒤를 이어 어른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효자마을이다.  

개동(蓋洞)
개동마을은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마을이 이룩된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300여 년 전 경주이씨가 입주하여 살고부터 김해김씨등 많은 씨족들이 옮겨와 마을을 이루었다. 100여년 전까지는 운곡(雲谷)이라 불렀는데 구름골이라 하여 마을 이름이 좋지 않다고 개동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황새봉 능선에 일본인이 거인이 출생한다고 쇠말뚝을 박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고모(古慕)
진례면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고모는 처음에는 고모실이라 하였는데 마치 송아지가 어미소를 그리워하여 되돌아보는 형상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경주이씨 달성서씨들이 입촌하고 김해김씨 전주이씨 밀양박씨등이 옮겨와 마을을 이룬지 수백 년에 이른다.
고모와 신모 고령(일명 높은재)의 자연부락으로 마을의 북쪽 군도(郡道)의 길가에는 김해에서 가장 오래된 완산이씨의 열녀 정려가 있다.
높은재는 진례 주촌 한림면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적은 마을로 사방이 산으로 둘려싸인 작은 분지로 마치 진례면 전체의 축소판이라고도 부른다(전해들은 내용 추가)  

상우(上佑) 
전해오는 이야기에 신라시대부터 터실이란 곳에 마을이 크게 형성되어 있었다고 전하고 지금도 터실에서는 불상이나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다.
현재의 상우마을은 이씨 진씨 조씨 서씨들이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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