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유적지> 김해고읍성

가야유적 발굴자료 발굴명, 소재지, 지정여부, 참고문헌, 주요유물, 조사기관, 조사일지, 조사유구
발굴명 김해고읍성
소재지 봉황동 409-19번지 일원
지정여부 미지정
참고문헌 김해고읍성(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발굴조사 보고서 제26집) 발행일자-2008년 10월 25일 김해 가야사 조성사업 주차장 부지 문화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자료(경남문화재연구원 현장설명회자료 10-019) 발행일자-2010년 12월
주요유물 무문토기 저부, 고배, 대각, 호, 대부완, 병, 소옹, 파수, 기와 및 자기류, 영정주목 등
조사기관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경상남도교육청
조사일지 시굴-2006년 5월 15일 ∼ 2006년 7월 7일 발굴-2006년 8월 1일 ∼ 2006년 11월 3일
조사유구 통일신라~고려시대 토성

김해고읍성은 조선 세종 16년(1434년)에 축조된 석축읍성인 김해읍성보다 앞서 축조된 토성을 일컫는 것으로『김해부지도』,『김해부해동지도』에 부기된 김해읍성의 외곽에 존재하는 토성으로 추정되며, 일제 강점기 지적측량도를 참고하여 둘레를 계측한 결과 성벽은 5,400m 정도로 추정됩니다. 현재까지의 발굴조사에서 체성과 외벽, 내벽 일부, 내벽, 내황 등이 확인되었는데 발굴성과를 통해 김해고읍성은 기단석축형 토성으로 기저부에 기단석을 축조하고, 기단에는 430~490㎝ 또는 450~460㎝의 간격으로 영정주를 세운 뒤 체성부는 판축공법을 사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김해고읍성의 축조시기는 기단토층에서 출토된 6세기대 토기를 통해 통일신라 지방행정체제 정비 시기로 추정하거나, 영정주의 AMS절대연대와 관련하여 고려 성종 14년(995년) 김해를 안동도호부로 삼는 시기로 상정하기도 합니다. 한편 고려 우왕(1374~1388년) 때 김해부사 박위가 읍성을 축조한 기사의 내용에서 박위가 읍성을 축조할 당시 이미 둘레가 8,683척이나 되는 토축으로 된 ‘분성’이 축조되어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 세종 때 축조된 김해읍성보다 앞서 축조되어 고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토성의 존재를 보다 확실하게 뒷받침하는 자료라 하겠습니다.
김해고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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