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김해]
흥선대원군과 만장대
-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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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9 10:38:03
- 담당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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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복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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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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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에 김해출신으로 흥성대원군의 신임을 얻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김종대(金鍾大, 1873∼1949)는 광무7년(1903)에 상경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대원군을 만나 둘째 손자 민용(玟鎔)과 함께 배우며 가까이 지내 8년에 법부주사(法部主事)가 되었으나 10년에 단발을 거부하고 고향에 내려와 책과 가야금을 즐겼습니다. 명지의 염민(鹽民) 김만수(金萬壽, 1841∼?)는 바둑을 매우 잘 둬 14세 때 최연소 국수가 되었고, 18세에 상경하여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압록강 이남에서 제일이란 뜻의 녹일(綠一)이라는 칭호까지 받았습니다. 중국의 원세개와도 대국했다 하며, 30세 때에는 임금 앞에서 대국을 하여 의흥현감(義興縣監)을 제수 받았습니다. 점치기와 술수에 능통하였던 이유인(李裕寅, 1843∼1907)은 진령군(眞靈君)의 도움으로 고종22년(1885)에 무과에 급제하고, 양주목사가 되었고, 명성황후와 고종의 신임을 얻어 한성판윤(漢城判尹, 서울시장)과 경무사(警務使, 경창총장)을 거쳐 광무2년(1898)에 법부대신(法部大臣)까지 올랐습니다. 이러한 김해인과 대원군의 연분이 작용했는지는 몰라도 마침 김해의 중심인 분산의 정상에는 대원군이 내렸던 만장대(萬丈臺)라는 휘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현 봉수대 뒤편의 바위에 대원군의 휘호와 도장이 새겨져 있고 분산성내에는 흥선대원군의 은혜를 만세까지 잊지 못하겠다는 흥선대원군만세불망비(興宣大院君萬世不忘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대원군이 왜군의 침입을 막는 전진기지로서 분산성을 만 장의 높이나 되는 높은 대라 불러준 것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