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인구수 : 인구와가구페이지 참조
- 면적 : 50.2㎢(농지 10.1 대지 0.8 공장용지 1.4 임야 30 기타 7.9)
연혁
- 조선후기 : 마현고개 북쪽은 이작, 그 아래쪽은 일작, 생철과 봉림의 이름을 합하여 생림면이 되었음.
- 1914 : 지역분리로 안양리가 생겨 9개리가 되었으며 하북면 용덕리 일부와 밀양군 하남면 삼랑리 일부가 병합
- 1982. 4 : 생림면 봉림리 642번지 면청사 신축 이전
- 1983. 2. 5 : 금곡리와 생림리의 장재마을이 한림면으로 이속되어 8개리가 되었음.
1969년 생림면사무소
1981년 생림면사무소 전경
우리마을의 특징
- 김해시청에서 15km지점에 위치하고 임야가 63%를 점하는 산간지역
- 농업을 주업으로하고 딸기재배, 한우사육 등 축산농가가 많고 농공단지 2개소 및 관내 310중소기업체가 가동중이며
- 농업문화의 영향을 받은 토착민으로 온화한 정서에 마을단위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나 지속적인 공장유입 국도 58호선 및 대동-대구간 고속도로 공사로 향후 교통의 요충지로 변모될 것임
지명유래
나전리(羅田里)
풍수설로 나화낙자형(羅化落地形) 또는 선녀나대하강전형(仙女羅帶下降田形)의 명당이 있기 때문에 나밭이 되었다.
안금
나전리의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안금리였다가 1914년 나전리로 병합 지형이 거문고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
상나전
나밭고개를 넘어 생림면으로 들어오는 첫번째마을
하나전
마을 뒤에 옥녀직금형의 명당이 있다고 함
사촌리(沙忖里)
沙器店(포)이 있어서 沙器마을 또는 沙村이라고 하였다.
상사촌
윗사촌으로 여덟막고개로 상동면 여차리로 넘어간다
도요리(都要里)
옛날에는 都要渚라 하여 낙동강변에 수백호의 주민이 어업을 하며 살았다고 함. 도요새가 강가에 날아와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함.
도요
대맡이며, 맡은 마당場의 뜻이라고도 함. 양산군 원동으로 건너는 까치원 나루가 있었음. 浮屠가 있었다는 부딧골과 嚴政丞이 살았다는
엄실도 있음
생림리(生林里)
삼국시대 고분으로 추정되는 생림리 고분이 있고 원래 면사무소가 이곳으로 1982년에 봉림리로 옮겼다.
경동
300년전에 파평윤씨가 합천에서 옮겨와 개간하여 살기 시작하였다고 함
안양리(安養里)
1914년 창암, 신안, 선곡을 합하여 안양리가 되었다.
본안양
가락시대의 고분이 있고 서쪽에 있는 들은 모덩갯벌이라고 함
신안
신이라고 부르며, 서쪽에 있는 두 아름되는 팽나무가 있다.
선곡
마늘실이라 부르는데 뒷산이 마늘쪽처럼 생겼다해서 붙여진 이름임.
창암
창바위라고 하며 낙동강 제방이 있고 삼량진으로 건너가는 창암나루가 있었다
마사리(馬沙里)
낙동강가에 있어 옛날에는 마휴촌이라 불렀는데 나루터에 말이 쉬어 가는 곳이었다고 함.
마사
임진왜란때 왜장이 구축했다는 마사왜성이 있음.
독산
낙동강 나루터에 독뫼를 중심으로 모여 살고 있는 마을
송촌
솔밭으로 소나무가 우거진 골짜기라고도 하며 현풍의 솔리곽씨가 모여산다고 솔마라고 하다가 솔을 송으로 고쳤다고도 함.
생철리(生鐵里)
생철
무척산과 생림중학교가 있고 무척산 중턱에 가락국시대 허태후를 기리기위해 창건한 고찰인 모은암이 있다.
성포
신포리 였을때는 섭게라고 불렀는데 석개로 변하여 다시 성포로 불리게 됨
봉림리(鳳林里)
뒷산에 봉황이 숲으로 내려우는 모양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본봉림
조선후기에 금곡역이 이곳으로 옮겨 와 역촌이라고도 함.
산성
안성이라고도 하며, 가락시대의 성터가 산성산에 있다.
마현
말티라고도 부르며 산성북쪽으로 생철리와 경계를 이루고 금곡으로 넘어가는 말티고개가 있다.
학산
뒷산에 학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도 하며, 산이 학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함.